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441246?sid=102
올해 30대 후반인 A 씨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2013년 증권사에 입사했다. A 씨는 정식 애널리스트가 되기 전 리서치 어시스턴트(RA)로 일했는데 월급은 250만 원가량이었다. 월급을 모아선 재산을 불리기 어렵다고 판단한 A 씨는 3억 원의 빚을 내 투자를 시작했고 수익률 100%를 달성하자 회사를 그만뒀다.
주식과 가상화폐 가격이 치솟던 지난해에는 자산을 약 20억 원까지 불려 주변에서 ‘파이어족’(경제적으로 독립한 조기 은퇴자)이라는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올 들어 주가와 가상화폐 가격이 급락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최근 금리까지 오르면서 3억 원가량을 빌려 투자하던 A 씨가 매달 내야 하는 이자는 280만 원이 됐다. 물가도 올라 자산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된 A 씨는 공인중개사 자격증과 부동산 회사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주식과 가상자산, 부동산 등에 투자해 자산을 불린 뒤 조기 은퇴를 꿈꿨던 파이어족들이 최근 자산가치 하락을 겪으며 다시 일터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20대 후반인 B 씨는 회계사로 대형 회계법인에 재직 중이던 2019년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마이너스통장을 통해 마련한 종잣돈으로 적잖은 수익이 나자 이듬해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전업 투자를 시작했다. 하지만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마련했던 2억 원의 이자만 해도 매달 100만 원이 되자 2년 만에 파이어족의 꿈을 버리고 회계법인 재취업을 모색하고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자산가치가 폭락하면서 (투자로) 조기 은퇴를 꿈꿨던 일부 젊은 세대가 적잖은 타격을 받고 있다”며 “대박의 꿈이 멀어지고 안정적인 생활이 더 중요해지면서 자산 가격 폭등 시기에 평가 절하됐던 노동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파이어족을 꿈꾸는 이들 사이에선 이른바 ‘4% 법칙’이 상식처럼 여겨졌다. 199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의 재무관리사 윌리엄 벤젠이 연구한 자산 관리 법칙인데, 연간 생활비의 25배를 모은 후 매년 약 4%를 지출하면 일하지 않고 투자 수익만으로 여생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10억 원을 모은 경우 첫해는 4000만 원, 이듬해는 4000만 원에 물가상승률을 더한 만큼 지출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는 안정적인 투자 수익을 전제로 하는데 최근 자산가격이 급락하고 물가까지 오르면서 더 이상 ‘4% 법칙’에만 매달릴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여기에 대출까지 받아 투자한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한 이후 증권사가 고객 주식을 담보로 빌려주는 신용거래융자 금리는 연 10%에 육박한다.
이를 두고 한국에서 왜곡됐던 ‘파이어족’의 의미가 정상화되는 과정이란 지적도 나온다. 강창희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교육포럼 대표는 “미국에서 파이어족은 고액 연봉자가 급여를 모아 조기 은퇴한 뒤 절약하며 사회봉사 등 제2의 삶을 사는 것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재테크로 단기간에 대박을 내고 은퇴하는 것으로 왜곡됐던 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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